CPA가, ROAS가, 예산 소진율이 - 숫자로만 대화하는 에이전시 문화
- 06 Dec, 2025
아침 인사도 숫자로
출근했다. 팀장이 물었다. “주말 잘 보냈어?” 내 대답. “네, ROAS처럼 효율적으로요.”
웃긴 게 뭔지 아나. 팀장도 웃었다는 거다.
우리 팀 슬랙 채널 이름. ‘#cpa-싸움-본부’. 회의실 예약 메시지. “오후 2시, CTR 개선 회의, 30분 소진 예정.” 점심 메뉴 투표. “치킨 CVR 80%, 돈까스 CPC 9000원.”
이게 농담이 아니다. 진짜로 이렇게 말한다.
신입이 왔다. 첫날 환영 멘트. “우리 팀 이탈률 낮으니까 오래오래 있어.” 신입 표정이 굳었다. 당연하지. 뭔 소린지 모를 거다.
디자이너가 물었다. “점심 뭐 먹을까?” AE 대답. “ROI 높은 걸로.” 디자이너. ”…그게 뭔데?” AE. “가성비요.”
변역이 필요한 직장. 여기가 맞다.

회의 시작 10초 만에 약자 5개
회의 시작했다. 팀장 첫 마디.
“이번 캠페인 CPA 1만 2천, 목표 대비 120%. CVR은 2.3%로 전월 대비 -0.5%p. CTR은 양호한데 ROAS가 380이라 광고주가 불만. CPM은 낮췄는데 CPC가 올랐어. 왜 그럴까?”
10초. 약자 7개.
신입이 노트북 켰다. 열심히 검색한다. ‘CPA 뭔지’ ‘CVR 의미’. 나도 1년차 때 그랬다. 지금은 그냥 머리에 박혀 있다.
미디어플래너가 말했다. “CPV 기준으로 보면 VTR이 낮아서요. 그래서 eCPM이 높아지고, 결국 ROAS 하락.”
과장이 끄덕였다. “그럼 타게팅 CPC 모델로 바꿔볼까? CPL 개선될 수도.”
나는 받아적었다. 약자만 8개 더 나왔다.
회의록 쓰는데 한글이 10%도 안 된다. 나머지는 다 영어 대문자.
외부 사람이 우리 회의 들으면 뭐라고 할까. “여기 외국인 회사예요?” 아니면 “암호 쓰세요?”
둘 다 맞다. 우리끼리만 통하는 암호. 그게 마케팅 용어다.

광고주 전화에도 숫자부터
광고주한테 전화 왔다. 오전 11시.
“대리님, 어제 광고 어땠어요?” 내 대답. 자동이다. “CPA 11000원, 목표 대비 110%입니다. 전환수 52건, CPM 5800원으로 안정적이고요. CTR 1.2%는 업계 평균 상회입니다.”
광고주. ”…그러니까 잘 된 거예요?” 나. “네, ROAS 420이면 양호합니다.” 광고주. “아 네…”
끊고 나서 생각했다. 방금 한국어 했나?
숫자만 10개 말했다. 그게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광고주는 이해 못 했을 수도 있다.
다시 전화했다. “죄송한데요, 쉽게 말하면 100만원 쓰셔서 420만원 매출 나왔습니다.” 광고주. “아!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죠!”
맞다. 나 지금 로봇처럼 말하고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갔다. 후배가 물었다. “언니, 메뉴 뭐 추천해요?” 나. “CVR 높은 거.” 후배. ”…?” 나. “아 미안. 맛있는 거.”
입에서 자동으로 나온다. 일상 대화에도 마케팅 용어가 튀어나온다.
남자친구한테 카톡 보냈다. “오늘 야근. 퇴근 시간 TBD.” 남친. “TBD가 뭐야?” 나. “To Be Determined. 미정.” 남친. ”…그냥 미정이라고 하지.”
맞는 말이다. 근데 습관이다. 이미.

저녁 먹으면서도 광고 얘기
저녁 7시. 팀 회식.
메뉴 정했다. 삼겹살. 고기 구우면서 하는 얘기.
“이번 캠페인 CPA 진짜 낮췄다.” “CTR이 생각보다 높더라.” “근데 ROAS는 왜 안 오르지?” “타게팅 문제 아닐까. CPC가 너무 높아.”
고기 먹으면서 하는 얘기가 이거다. 연애 얘기? 없다. 주말 계획? 없다. 취미? 그게 뭐더라.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들, 일 얘기 아닌 거 안 해요?” 다들 멈췄다. 고기 굽는 소리만 들렸다.
과장이 웃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이거밖에 없어.” 맞다. 슬프지만 맞다.
일 얘기 아닌 거 하려고 했다. 영화 얘기. “기생충 봤어?” 대리. “응, CGV 전환율 높더라.” 나. ”…그게 아니라 영화 내용.” 대리. “아 맞다. 재밌었어.”
3초 만에 다시 일 얘기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다음 주 캠페인 예산 배분 어떻게 하지?” “페이스북 CPM 올랐던데.” “구글 CPC도 만만찮아.”
고기 다 먹을 때까지. 마케팅 용어만 오갔다.
집 가는 지하철. 옆자리 사람들 대화가 신기했다. “주말에 등산 가자.” “요즘 드라마 뭐 봐?”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숫자로만 대화하게.
주말에도 대시보드 확인
토요일 오전 11시. 침대에 누워 있다.
자동으로 손이 간다. 핸드폰. 광고 대시보드 앱 열었다.
어제 CPA. 확인. 오늘 0시~현재 소진율. 확인. CTR 변동. 확인.
남자친구가 물었다. “주말인데도 봐?” 나. “습관이야.” 남친. “ROAS 확인하는 거지?” 나. ”…어떻게 알았어?” 남친. “나도 에이전시니까.”
우리 커플 대화. 이거다.
“오늘 CPA 어때?” “괜찮아. 너는?” “나도. CTR 올랐어.” “좋네.”
이게 주말 아침 대화다. 로맨틱하지 않다. 근데 이게 편하다.
친구 만났다. 대학 동기. 일반 회사 다닌다.
친구가 물었다. “요즘 어때?” 나. “바빠. ROAS 맞추느라.” 친구. ”…뭐?” 나. “아 미안. 광고 성과.” 친구. “너 말하는 거 하나도 모르겠어.”
설명했다. 5분 동안. CPA가 뭔지. ROAS가 뭔지. CTR이 뭔지.
친구. “그래서 그게 다 뭐 하는 거야?” 나. ”…광고.” 친구. “광고면 광고지, 왜 이렇게 복잡해?”
대답 못 했다. 맞는 말이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할까. 간단하게 말하면 안 되나.
근데 이미 익숙해졌다. 이 언어에. 이 숫자에.
마케팅 용어 없이는 설명 불가
월요일 아침. 신규 광고주 미팅.
대표님이 물었다. “우리 광고 어떻게 할 건가요?”
기획서 펼쳤다. 준비 많이 했다.
“타게팅 기반 퍼포먼스 마케팅으로 CPA 최적화하고, ROAS 목표 350 이상 달성하겠습니다. CTR 1% 이상 유지하면서 CPM 효율 개선하고, CVR은 2.5% 목표로…”
대표님 표정이 굳었다. 옆에 마케팅팀장도 멍했다.
대표님. ”…다시 한 번 천천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식은땀 났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했다. 이번엔 쉽게. “100만원 광고비 쓰시면 350만원 매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아! 그거네요.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죠.”
미팅 끝나고 돌아왔다. 팀장이 물었다. “어땠어?” 나. “제가… 너무 어렵게 설명한 것 같아요.” 팀장. “그럴 수 있지. 우리끼리만 쓰는 언어니까.”
맞다. 우리끼리만 통하는 언어.
에이전시 5년. 이 언어가 모국어처럼 됐다. 한국어보다 편하다. 숫자가 단어보다 빠르다.
근데 가끔 생각한다. 이게 맞나?
광고주는 이해 못 한다. 일반 사람들은 뭔 소린지 모른다. 내 설명을 듣고 고개 끄덕이는 사람. 같은 에이전시 사람뿐이다.
우리는 섬에 산다. 마케팅 용어라는 섬. 그 안에서만 통한다.
숫자 없으면 불안한 사람들
점심시간. 식당 줄 서 있다.
앞에 두 명. 우리 회사 사람 같다. 들렸다.
“어제 CPM 얼마 나왔어?” “5200원. 너는?” “나는 6800원. 좀 높아.” “타게팅 때문 아닐까?”
줄 서서도 숫자 얘기.
내 차례 왔다. 주문했다. “제육볶음 하나요.” 직원. “매운 거요, 안 매운 거요?” 나. 자동으로. “CTR 높은 걸로요.” 직원. ”…네?” 나. “아 죄송해요. 매운 걸로요.”
미쳤나. 식당에서도 마케팅 용어가.
밥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 진짜 이상해진 건가.
핸드폰 꺼냈다. 대시보드 확인. 점심시간에도. CPA 확인. ROAS 확인. 예산 소진율 확인.
숫자 보면 안심된다. 숫자 없으면 불안하다. 이게 직업병인가.
옆 테이블 사람들. 웃으면서 얘기한다. “주말에 제주도 갔다 왔어.” “날씨 좋았어?”
우리는? “주말에도 대시보드 봤어.” “CPA 떨어졌더라.”
이게 우리 일상이다. 숫자가 일상. 약자가 언어.
슬픈가. 근데 어쩌겠어. 이미 이렇게 됐는걸.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저녁 8시. 퇴근 준비.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 저 이상한가요?” 나. “왜?” 신입. “친구들이 제가 하는 말 이해 못 한대요. 제가 이상하게 말하는 것 같대요.”
웃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정상이야. 우리가 특수하게 말하는 거지.” 신입. “근데 선배님은 언제부터 이렇게 말했어요?” 나. “2년차부터. 어느 순간 자동으로.”
생각해보니 맞다. 2년차 어느 날부터. 숫자가 먼저 나왔다. 한국어보다.
“CPA 얼마야?” 가 “상황 어때?”보다 빨랐다. “ROAS 확인했어?” 가 “잘 되고 있어?”보다 정확했다.
신입. “저도 그렇게 될까요?” 나. “응. 1년만 있으면.”
단언했다. 확신했다. 이게 이 업계 언어니까.
퇴근했다. 지하철 탔다.
옆에 두 사람 대화. “오늘 회의 어땠어?” “괜찮았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았다가 뭐야. 구체적으로.’
중독됐다. 숫자에. 구체적인 것에. 애매한 표현을 못 견딘다.
“괜찮았어”보다 “목표 달성률 90%“가 낫다. “잘 됐어”보다 “전월 대비 120%“가 정확하다.
이게 에이전시가 만든 나다. 숫자로 생각하는 사람.
집 도착했다. 문 열었다.
자동으로 생각했다. ‘오늘 업무 달성률 85%. 내일 목표 3건. 예상 소요 시간 6시간.’
일상도 KPI로 생각한다. 무서운 거다. 근데 편하다.
결국 우리만의 언어
금요일 저녁. 회식 2차.
다들 취했다. 그래도 하는 얘기.
“이번 분기 CPA 평균 얼마 나왔어?” “ROAS는 목표 달성했어?” “다음 분기 예산 얼마야?”
술 먹어도 숫자. 취해도 마케팅 용어.
과장이 말했다. “우리 진짜 병신들이다.” 다들 웃었다. 맞는 말이니까.
“일반 사람들은 우리 말 이해 못 해.” “우리끼리만 통해.” “근데 이게 편해.”
맞다. 이게 편하다. 우리만의 언어. 우리만의 세계.
외부 사람한테 설명하기 귀찮다. CPA가 뭔지. ROAS가 뭔지.
같은 업계 사람 만나면 편하다. “ROAS 어때?” 하면 끝이다.
신입이 물었다. “저는 언제쯤 선배님들처럼 될까요?” 팀장. “곧 돼. 어쩔 수 없어.”
안타깝지만 맞다. 여기 있으면 자동으로 된다.
숫자로 말하고. 약자로 생각하고. 대시보드를 일상처럼 확인하는 사람.
이게 에이전시 문화다. 이게 우리 언어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모르겠다.
근데 확실한 건. 이미 이렇게 됐다.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이제 CPA, ROAS, CTR 없이 설명 못 한다.
숫자 없으면 불안하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답답하다.
이게 5년차 에이전시 AE의 현실이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근데 뭐 어쩌겠어. 월요일 되면 또 출근한다.
그리고 또 물어본다. “오늘 CPA 어때?”
결국 마케팅 용어는 우리의 제2언어가 됐다. 아니, 제1언어인지도.
